In photography there is a reality so subtle that it becomes more real than reality. -Alfred Stieglitz
Soviet tank T-34 of N. Korea army making entry into Seoul 3days after war breaking out. 전쟁 발발 3일만에 서울 시내로 들어온 북한의 T-34
이승만은 자신은 중앙청에 집무하고 있으며 용감무쌍한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도망가는 북한군을 추적중이니 국민들 모두 평상시처럼 직장으로 출근하라고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녹음해 놓은 것을) 방송했지만, 이미 그는 서울을 떠난 뒤였다.
Demolition of Han river bridge.
폭파된 한강 인도교(1950.6.28)와 폭파되는 한강철교(1950.7.3)의 모습.
이승만과 정부 수뇌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폭파를 목격한 이형근은 "아비규환이니 인류의 비극이니 하는 것은 그때의 정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목격자는 "북쪽 두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下枝)만을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미군 장교는 500명에서 800명이 폭사(爆死)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다른 증언자는 4천 명 이상의 사람이 다리위에 있었다고 말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91쪽>
당시의 전황으로 볼때 북한군이 한강에 도달하기까지는 6~8시간의 여유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난가는 사람들을 그대로 둔채 서둘러 폭파한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국군의 한 장성(이응덕)은 한강 다리 폭파가 인민군의 짓인 줄 알고서 "과연 적이지만 전술을 아는 놈들이구만"이라며 감탄했을까.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 혼자서 폭파결정을 내렸을리 만무하지만 책임은 최창식 혼자서 뒤집어 썼다. 이승만이 '각하 너무 많이 내려오셨습니다.'라는 참모들의 건의에 못이겨 대구에서 대전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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